【건강다이제스트 | 최형기 박사(연세대학교 영동세브란스병원)】
L씨는 첫눈에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아내가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말을 할 때에도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32세, 결혼 3년째. 아직 모든 면에서 팔팔해야 할 나이였다. 이렇게 젊은 사람이 풀 죽은 모습으로 상담을 하러 오면 더욱 마음이 좋지 않다.
"6개월 정도 됐습니다. 갑자기 말을 안 듣는 겁니다. 그 전에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처음엔 일시적인 현상이려니 했다고 한다.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부부 사이도 좋고, 아직 신혼이나 마찬가지인지라 일 년 전만 해도 거의 매일 관계를 가졌던 부부였으니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계속 안 되는 건 아니었어요. 어떨 땐 발기가 제대로 되기도 하는데, 어떨 땐 전혀 안 되는 겁니다. 거짓말처럼."
믿기지 않는 듯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 발기가 되어도 전과 같지는 않더라구요. 불안하고…, 결국 얼마 전부터 아예 잠자리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는데 아내가 바라는 눈치라 시도했지요. 그런데 역시 안 되었습니다. 포기하고 일어서서 담배를 입에 물고 나오는데 갑자기 아내가 울어버리는 겁니다."
그 말을 하는데 내 눈에도 L씨가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 아내 딴에는 그동안 말도 못하고 참고 참다가 그만 터뜨리고 말았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이러는 겁니다.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느냐고, 당신 몸과 마음을 온통 빼앗아 가버린 여자가 누구냐고 말입니다. 참, 내."
’아하, 그런 해석을 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장애가 있던 남편도 아니고 갑자기 고개를 숙여버렸다면 아내의 입장에선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한 일이다. 나까지 궁금해졌다. 왜 이 건장한 젊은이의 그것이 말을 듣지 않아 아내를 울리는지. 짐작으로는 심인성 같았지만 일단 기본적인 검사를 해보았다. 역시 기질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아내와 섹스를 하는 도중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아내로부터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든지, 불쾌한 기분이 든 적이 있다든지…."
"아뇨. 아내는 잠자리에서도 사랑스러운 여자입니다."
"그럼 정말로 다른 여자를 알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는 법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한 끝에 그 원인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L씨는 아내 몰래 근심을 껴안고 살고 있었던 것이고, 그 근심이 결국 그의 남성까지 꺾어버렸던 것이다.
L씨가 주식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주식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친구에게서 자극을 받아서였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야말로 지갑 한도 내에서 했다. 그러다가 조금 재미를 보자 욕심이 생겼다. 돈을 꾸어서 투자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그만 탈이 난 것이다. 원금은 고사하고 거의 세 배 가까운 적자를 냈고, 돈을 갚기로 한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왔지만 갚을 길이 없는 그는 혼자 속만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만의 고민은 결국 L씨의 육체까지 점령하고 말았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발기부전으로까지 이어지리라고는 보통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남성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 사례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L씨에게 가장 먼저 아내에게 사실을 밝히라고 충고해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금세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 번 꺾여버린 남성은 그리 쉽게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아내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L씨는 다시 건강한 남성으로 돌아오느냐, 아니면 평생 스스로 기죽어 지낼 수밖에 없는 고개 숙인 남성이 되느냐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L씨와 똑같은 상황은 아니겠지만 많은 남편들이 고민이나 우울증으로 인해 발기부전을 겪고 있다. 심적 부담감이나 고민이 있으면 모든 일을 할 때 위축되고 육체적으로는 임포텐스가 올 확률이 높다. 동시에 그와 반대로 성기능에 장애가 생김으로써 자신감이 사라지고 만사에 위축된 심리상태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정신적 건강과 성적 능력은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례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다. 가족계획 때문에 피임을 하던 부부가 아기를 갖기 위해 피임약을 끊었다. 약을 먹긴 하지만 임신이 될까, 걱정되던 때와는 달리 마음 편히 섹스를 할 수 있어 처음 얼마간은 좋았다고 한다.
그 아내는 기초 체온을 측정, 기록하고 배란기가 되면 지체없이 관계를 가지자고 하는 등 아주 적극적으로 아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남편의 발기가 안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전까지 한 번도 그런 문제를 겪어보지 못한 남편은 당혹스러워 더욱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발기가 더 안 되었다. 결국 남편이 아기를 원하지 않는 것으로 아내는 오해를 하고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임신을 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어 섹스에 소극적인 여성의 경우처럼 그 남편은 배란일을 정해놓고 섹스를 하는 등 너무 임신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받았고, 결국 발기 능력에까지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럴 경우엔 생리주기 기록 같은 건 집어던지고 자유롭고 편하게 ’하고 싶을 때’,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처음 얼마간은 다시 발기 능력이 정상이 되도록 직접적인 성행위를 자제하고 애무만 하는 등 ’아기를 만드는’ 작업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어쨌거나 정신적 부담감이나 스트레스로 인한 발기부전의 치료는 오로지 아내만이 할 수 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의 지원은 물론이고 실제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도 아내는 커다란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과 남편의 행복을 지키는 길임을 곰곰이 되새기면서.
* 이 글은 그의 저서 <아내와 남편이 함께 하는 섹스 코디네이션>(명진출판 刊)의 일부분을 옮긴 것이다.
글쓴이 최형기 박사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주임교수로 국내 최초로 영동세브란스 병원에서 성기능장애 클리닉을 개설하였다. 성 치료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그동안의 치료와 임상실험을 인정받아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시술 및 강의 초청이 쇄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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